파이형 인재와 통섭형 인재

책 <THICK data> 를 읽으며 '통섭형 인재'에 관하여 떠오른 생각들.

파이형 인재와 통섭형 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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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THICK data> 를 읽으며 '통섭형 인재'에 관하여 떠오른 생각들.

T자형 인재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깊이를 가지면서 다른 분야에도 폭넓은 지식과 관심을 가진 인재를 말한다.

나의 경우에는 기획자가 전문 분야이고 확장 분야는 PM 영역으로 볼 수 있겠다. 더 확장하면 IT 분야에서 디자인&개발과 관련된 넓고 얕은 지식들이 될 수 있겠다.

그런데, 최근에는 'T자형' 인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문 분야가 둘 이상인 'π형 인재', 전문 분야가 3개 이상인 '폴리매스형 인재' 또는 '통섭형 인재'가 각광받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용어들이 단순한 말장난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 창의적 사고를 위해서는 다양한 전문 분야의 연결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저자의 경험담이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에 진학한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인류학 박사 과정 학생 대부분이 학부 때 인류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포함한 한국인 두 명만 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했고, 나머지는 문학, 정치학, 경제학 등 다른 학문을 전공한 이들이었다. 인류학 박사를 하려면 당연히 학부부터 인류학을 공부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인류학의 기본도 모르면서 어떻게 박사 과정을 하겠다는 걸까, 그들의 선택이 의아하기만 했다. 나는 그들보다 4년이나 앞서 인류학을 공부했으니 실력에서 밀리진 않겠다는 자신감과 안도감도 들었다.

이런 내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내가 제출한 리포트에 교수님이 달아주신 코멘트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Great summary! What’s your opinion?” 핵심 정리는 잘했지만 내 의견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두 줄짜리 코멘트는 내게 크나큰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상쾌한 해법이기도 했다. 내가 나만의 의견이 아닌 저명한 인류학자들의 이론을 줄줄 읊고 있을 때, 다른 학생들은 인류학 관련 이슈를 각자 자신이 전공한 분야와 연결해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해석하고 창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내가 학부 4년간 공부했던 인류학의 테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 그들은 철학, 의학, 문학, 경제학 등의 다양한 시각에서 때로는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때로는 기발한 발상의 전환을 보여 줬다. 이러니 같은 책을 읽어도 통찰의 폭과 깊이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 잡스는 창의성을 '연결'로 정의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새롭게 연결하고 재배치하는 능력이 결국 창의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창의성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앞서 볼 수 있는 통찰력으로 연결된다.

전문성, 상상력, 통찰력이 뛰어난 개인을 생각해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 정약용,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등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들은 통섭형 인재의 대표적 인물이고 인간계의 정점을 찍은 GOAT(Greatest Of All Time)이다.

당연히 우리가 이들처럼 될 수는 없지만 앞으로의 시대에서는 우리도 통섭형 인재가 되기 위한 역량을 키워나가야만 한다.

T자형 인재도 되기 어려운 마당에 파이형 인재, 통섭형 인재가 무슨 말인가 싶지만 생성형 AI 기술의 발달로 과거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도 이제는 할 수 있게되었다.

내가 성인이 되었을 무렵 나는 미적 감각, 음악적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당연히 디자인과 작곡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AI 기술을 이용해 내가 상상하는 이미지와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는 다소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불가능이 가능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기술이 발전하고 내가 새로운 툴에 익숙해짐에 따라 이 시간은 계속해서 단축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 흐름속에서 저자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조직적 차원에서 다양성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 모두 동의되는 메세지들이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기업들은 왜 나를 선택했을까? 해당 분야 전문가도 아니고, MBA 출신도 아닌 나와 같은 사람이 기업 의사 결정의 다양성을 보장 해 주기 때문이다.

전문가보다 비전문가가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새로운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늘 그 분야의 문외한이자 비전문가였지만, 인류학자로서 인류학적 시각이라는 정교한 렌즈로 비즈니스 이슈를 바라보고 재정의하는 훈련이 돼 있는 사람이었다. 한 분야에 단단하게 자기 뿌리를 내린 사람은 다른 분야에까지 뿌리를 뻗어 살아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분야의 생태계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세계 일류 기업들이 최근 들어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인재를 영입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의 정답이 더는 오늘의 해법이 될 수 없는 시대, 기업들은 변화무쌍한 환경을 이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복잡해져만가는 비즈니스 이슈에 대응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혁신과 진화를 이뤄 내려면 다양한 구성원이 공존하는 기업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은 것이다.

다양성에 주목하게 된 오늘날 기업들이 애타게 찾아야 하는 인재도 결국은 주변인이다.

우리는 흔히 한 조직에 깊이 연루한 ‘완벽한 내부인’만이 그 조직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거라 믿는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문화는 드러내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훨씬 많으며 묘하게도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감춰진 바를 가장 모른다”라고 했다.

이 말처럼 특정 산업 분야에 완전히 적응한 내부인은 조직의 문제를 파악하거나 새로운 발상을 하기가 오히려 더 어려운 면이 있다. 그렇다고 그 분야와 동떨어진 외부인이 더 유리한 것도 아니다. 외부인은 내부의 사정이나 정보를 알지 못하므로 실효성과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아이디어를 내기 십상이다.

그러나 외부인이 그 분야에 뛰어들어 내부인의 시선을 이해하고 주변인의 정체성을 갖게 되면 조직이 당면한 이슈를 새로이 파악하고 해결하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자동차 회사와 나이키가 더는 제조업으로 분류되길 거부하고, 백화점은 유통업을 넘어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진출하려는 이때, 혁신의 성패는 기업 내에 얼마나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느냐에 달렸다.

기업이 왜 문화 다양성을 중시해야 할까.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기업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의사 결정을 끌어내고 혁신을 가능하게 한다는 실질적인 이유로 중요하다.

미국의 카네기멜런대학교 경제학과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는 저서 《Cities and the Creative Class》 에서 일명 ‘게이 지수’를 통해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이 도시 발전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게이 지수’란 전체 인구 대비 지역 내 게이 집중도를 말한다. 연구 결과 게이 지수가 가장 높은 다섯 개 대도시(샌프란시코, 워싱턴 DC, 오스틴, 애틀랜타, 샌디에이고)는 최첨단 산업 상위 15개 대도시에 포함돼 있었다.

반면 게이 지수가 낮은 버펄로나 라스베이거스 등은 최첨단 산업 하위 15개 도시에 속했다. 게이 외에 이민자, 보헤미안 수를 기준으로 다양성 지수를 추출해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이런 결과에 대해 리처드 교수는 다양성을 수용하는 태도가 지역 성장으로 전환된다는 증거라고 설명한다.

기업의 다양성도 마찬가지다. 다양성을 수용하는 기업이 thick data로 도출된 창의적인 통찰도 훨씬 더 잘 받아들이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개선으로 이어진다.

반면 획일적 문화를 추구하는 폐쇄적인 기업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하거나 수용하지 못해 결국 도태된다. 끊임없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경계선 밖을 기웃대고, 경계선 안과 밖을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업과 개인만이 미래를 바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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